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드웨이 해전 (문단 편집) === 전초전 ===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만 하루전인 1942년 6월 3일 오전 8시, 일본은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 공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대한 상륙 작전도 병행됐는데, 미군의 저항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방에 파견된 제8기동부대의 사령관 테오볼드 소장이 "일본 놈들이 알래스카(...)를 공격할 것이다."라면서 부대를 엉뚱한 곳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양 측 모두 별다른 손해 없이 공습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일본군이 자신들이 예측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만족하고, 곧 미드웨이에 일본 함대가 출현할 것이므로 '''정찰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6월 3일 오전 9시, 미드웨이에서 파견된 [[PBY 카탈리나]] 정찰기가 미드웨이에서 930km 떨어져 있는 해상에 있는 일본 제 2 수뢰전대를 발견했다. 이로서 '''미군은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날 오전까지도 미군 함대의 위치과 미군 함대가 미드웨이 주변에 존재하는지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며, 다음날 아침에야 미 함대의 존재와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정보전에서의 성패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패를 가른 시발점이 되었다. 정찰기를 통해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한 미군은 곧장 [[B-17]] [[폭격기]]를 출격시켰다. 오후 4시경 일본 선단에 도달한 B-17 폭격기들이 일본 함대를 폭격하였으나 수평폭격의 한계로 인해 실패했다. 이어서 미군은 [[어뢰]]를 탑재한 PBY 카탈리나 비행정을 동원하여 새벽 1시경 다나카 라이조 제독의 수송 함대에 뇌격을 가해 수송선과 유조선에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속도가 떨어지는 수준의 피해였으며, 작전 참여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6월 3일 오전 9시, 미드웨이 정찰기가 일본 함대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나구모 제독은 정찰기와의 접촉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상황으로 여기고 그냥 보고만 올리고 말았으며 다음날 새벽에 미드웨이를 공격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정찰을 통해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한 미군 함대 지휘부는 일본 함대와의 교전 예상 지점으로 함대를 이동시켰고, 다음날 있을 대규모 교전을 대비하여 승조원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 6월 3일 하루 종일 미군이 4일 아침께 있을 해상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일본 해군 수뇌부는 미군 함대의 존재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날 새벽 있을 미드웨이섬 공격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고, 미 함대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